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슨 웰스 (문단 편집) == 생애 == || [[파일:2149.png|width=100%]] || [[파일:MV5BMTc5Nzk2MjkzNV5BMl5BanBnXkFtZTgwMDQ2MDI2NTE@._V1_.jpg|width=100%]] || || 찰스 포스터 케인, [[시민 케인]] (1941) || 해리 라임, [[제3의 사나이]] (1949) || || [[파일:Annex - Hayworth, Rita (Lady From Shanghai, The)_NRFPT_01.jpg|width=100%]] || [[파일:images-original.png|width=100%]] || [[파일:Brody-Orson-Welless-Mighty-Chimes-at-Midnight.png|width=100%]] || || 마이클 오해러, [[상하이에서 온 여인]] (1947) || 행크 퀸란, [[악의 손길]] (1958) || 팔스타프, [[한밤의 차임벨]] (1965) || [[1915년]] [[5월 6일]] [[미국]] [[위스콘신]] 주 케노샤에서 태어났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를 쓰고 [[만화]]를 그리며 [[연극]]까지 하는 [[천재]]적인 재능을 선보였지만, 인성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재능을 너무 믿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남들을 깔보고 무시했던 것. 사실 웰스의 인성에 문제가 있게된 건 집안 어른들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에 이상한 발명이나 하는 사람이었고, 할머니는 히스테릭한 성격에 [[오컬트]]와 [[마술]]에 심취해 있었다. 웰스는 이런 할머니를 경멸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웰스를 [[일리노이]] 주 [[우드스톡]]에 있던 비교적 당시로선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인 토드 고등학교에 보냈다. 이곳에서 웰스는 처음으로 연극을 만들고 자기가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웰즈는 같은 학생들로부터 [[집단괴롭힘]]을 당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괴롭히면 [[화장실]]로 도망쳐서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 나타나서 되레 자신을 괴롭히던 학생들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웰스는 학교에서 온갖 기행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들 앞에서 마술이나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식겁하게 만드는가 하면 [[핼러윈]]에는 흉물스런 분장으로 온 학교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크리스마스]]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연극이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직접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고. 그래도 교장이던 로저 힐은 웰스를 [[아들]]처럼 가르치고 지도했다고 한다. [[1931년]], 웰스는 16살의 나이에 [[아일랜드]]로 건너가 당나귀 마차를 끌고 그림을 그리며 여행을 했다. 그러던 중 [[더블린]]의 유명한 게이트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데뷔전 그는 그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극단의 단장에게 자신이 실제 브로드웨이 극단공연 경력이 많은 것처럼 속이고 나이까지 20대 초반으로 속였다고 한다. 단장이 눈치를 챘으나 그의 재치와 자신감, 그리고 오디션에서 보인 뛰어난 연기력에 매력을 느껴 배우로 고용했다고 한다. 이후 영국 런던 연극계에 진출하고자 했으나 외국인으로서 노동허가를 얻지 못해 [[1934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학교 연극무대에서 좀 더 활동하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라디오 드라마의 배우 겸 감독을 맡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설립한 머큐리 극장에서 연극배우로서의 활동도 계속 해나갔다. 이때 사교계의 여왕이자 여배우이던 버지니아 니컬슨과 결혼하고 단편영화 〈시대의 기억〉(The Hearts of Age)의 공동 감독을 맡아 니컬슨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세계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타격을 받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은 가운데, 미국 정부는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경제불황으로 타격을 입은 연극인들을 구제하고 대중들에게 문화생활을 보급하기 위한 차원에서 연방극장계획(FTP)를 추진했다. 이때 미국 정부는 웰스를 주목하고 그에게 FTP의 책임을 맡겼다. 웰스는 이에 불과 21살의 나이에 [[뉴욕]] [[할렘]]가로 가서 흑인 배우와 제작진들과 함께 연극을 제작하였다. 한편 부인 니컬슨의 제안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19세기]] 악명높은 [[아이티]]의 황제 [[앙리 크리스토프]]의 궁전으로 배경을 옮겨서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평론가들은 이런 시도에 불쾌해 했지만, 오히려 대중들은 열광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7년]], 웰스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뮤지컬]] 〈흔들리는 요람〉을 제작해 공연하려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내용을 문제삼은 FTP가 예산 부족을 핑계로 제작을 무산시키려했고 배우 조합에서도 출연 배우들을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방해했다. 결국 드레스 리허설 첫날에 배우 조합의 방해로 무대가 폐쇄되자 웰스는 이 뮤지컬의 공동 제작자인 존 하우스먼과 함께 역사에 길이남을 전설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공연 당일, 웰스는 미리 표를 예매하여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에게 "다른 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었으니 보실 분들은 저희를 따라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웰스와 배우들, 관객들이 20블록이나 떨어진 다른 극장으로 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FTP와 배우 조합의 방해 때문에 무대 세트도 배경음악을 연주할 [[오케스트라]]도 준비하지 못했고 각본과 작곡을 맡은 마크 브릿스테인만이 [[피아노]] 한 대 앞에 앉아있었다. 배우 조합은 웰스에게 '''"당신들은 절대 무대에서 연기할 수 없다."'''라고 한 터라 웰스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무대에서 공연 못한다고? 그럼 객석에서 하지 뭐."'''라는 놀라운 발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배우와 연주자들이 객석에서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공연했고 기발한 이 행동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에피소드는 [[팀 로빈스]]가 Cradle Will Rock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 [[파일:corbis-photograph-of-orson-welles-CN000010159.jpg|width=100%]]|| 이 성공 이후에도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당시의 [[파시즘|시대상]]을 담아 현대식으로 참신하게 각색/해석해 연출했다. 관객들이 가장 놀랐던 장면은 시인 시나가 원작과 달리 폭도들이 아닌 파시스트 비밀 경찰대에 손에 죽는 장면이었다고. 웰스는 당시 연출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역을 맡아 연기까지 하기도 했다. 이 연극을 올리면서 웰스와 머큐리 극단은 [[승승장구]]해 나가게 된다. 한편 머큐리 극단의 인기로 웰스는 [[CBS(미국 방송)|CBS]]의 라디오 방송에서 소설이나 연극들을 참신하게 재해석한 [[생방송 머큐리 극단]]을 방송하게 되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zOINk8BPOY)]}}} || || '''웰스가 장난으로 방송한 우주전쟁이 미국에 얼마나 혼란을 가져왔는지 설명하는 영상''' || 이러자 장난기가 발동한 웰스는 대대적으로 사람들을 낚을 궁리를 한 끝에 [[1938년]] [[10월 30일]], [[허버트 조지 웰즈|H. G. 웰스]]의 SF소설 《[[우주전쟁]]》을 각색한 〈화성인의 침공〉을 방송할 때 무대를 현대로 바꾸고 [[힌덴부르크#s-2|힌덴부르크호]] 사건 때를 연상시키는 뉴스 속보로 극을 시작해 이어 웰스 자신이 마치 실제로 화성인을 목격한 사람인 것처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웰스의 연기가 너무 실감난 나머지 라디오를 듣던 사람들은 '''진짜 화성인들이 쳐들어 온 것으로 착각해서'''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공포]]에 떠는 등 패닉 사태가 벌어졌다.[* 다만 이 사건은 단순한 낚시 해프닝에 머물지 않는다. 평단에서는 이 사건이 훗날 웰스 후기작에서 보이는 [[메타픽션]]적 요소와 자기반영적 요소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방송이 끝난 뒤 [[너 고소|고소했다]]. 결국 대국민 사과까지 하게 됐지만, 그 덕분에 미국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그 전까지 [[스폰서]]도 없던 방송에 [[캠벨 수프]] 사가 광고를 내보낼 정도로 인기 방송이 되었다.[* 훗날 "그렇게 될 줄 알았나요?"라는 질문을 받자 미소를 띈 채 대답을 피했다고 한다.] 웰스의 방송은 [[1940년대]] 후반까지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명성을 날렸다. 한편으로 이 일로 [[할리우드]]도 웰스를 주목했다. 이에 [[RKO]] 라디오 픽처스에서 웰스를 채용해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웰스는 RKO사와의 만남에서 '''"할리우드는 아이가 가지고 싶은 최고의 [[장난감]]"'''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에 RKO사는 웰스에게 영화 제작을 맡겼다. 웰스의 재능을 시기하던 할리우드 사람들은 웰즈가 35살이나 되어야 감독이 될 거라며 비웃었지만, 오히려 웰스는 RKO사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약관 20대 중반의 나이에 수십 년 경력의 최고 베테랑 감독이나 행사할 수 있다는 최종편집권까지 받을 정도였다.[* 당시 할리우드에선 감독은 말 그대로 영화사의 고용인에 불과했고 감독이 영화에 개입할 수 있는 측면은 적은 편이었다. 영화사 사장이 영화를 마음껏 주무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웰즈는 당초 조셉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 Heart of Darkness. 바로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다.]을 영화화하려 했으나 예산이 많이 들어 포기하고[*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의 세계에서는 웰스가 이 영화 제작에 성공했다고 언급된다.] 대신 제작에 나선 게 영화 역사상 길이 남을 걸작으로 오늘날까지 인정받는 '''〈[[시민 케인]]〉'''이다. 〈시민 케인〉은 당대의 유명한 신문왕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엄청난 부자이자 아주 골때리는 일도 많이 저지른 인물. 온갖 예술품을 사 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하루는 무척이나 갖고 싶어하는 조각품을 사진으로 보았다. 그런데 도무지 이게 어디 있는지 정보를 찾지 못 해 탐정을 고용했다. 그리고 1년 뒤, 탐정이 돌아와 드디어 조각의 행방을 알게 됐다. 바로 허스트가 사 모은 예술품을 전시한 곳에 있었단다. 즉 지가 예전에 사 두고도 잊어 버리고 헛돈 쓴 셈.]를 모델로 그를 풍자하는 영화였다. 감독 겸 주연이던 오손 웰스가 신문재벌 역할을 맡은 건데 스토리는 그런 신문재벌이 사치와 허영, 불륜 등에 빠졌다 정치인까지 도전하는데 결국 선거도 망하고 회사일도 망하고 다 망해서 비참하게 죽는 내용이었다. 그 과정 중에 허스트가 실제로 했다고 소문났던 안 좋은 일들도 하는 장면이 있었고, 결국 비참하게 죽는다는 내용 때문에[* 역시 언론계의 거물 헨리 루스도 모델로 삼았다. 단, 이 사람은 영화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분노한 허스트는 어떻게든 이 영화의 제작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웰스가 이 영화를 완성하자 온갖 [[로비]]로 다수의 지역에서 이 영화의 개봉을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시민 케인〉은 참신한 시도의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실패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카데미 시상식]]은 〈시민 케인〉을 9개 부분에 후보로 지명했지만, 정작 각본상 하나만 달랑 주고 말아서 이를 두고 아카데미 역대 최악의 실수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딥 포커스 기법을 처음으로 완벽한 완성도를 보이며 사용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이라는 영화에서 사용되었던 딥 포커스 기법도 예술적으로 훌륭하여 후세에 찬사를 받긴 하지만, 시민 케인은 그보다는 자본이 더 들어간 영화인만큼 확실히 퀄리티 있는 촬영기술과 그것이 잘 활용되는 연출을 통해 그야말로 예술적 + 기술적 완성도를 모두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쨌든 걸작을 만들었음에도 흥행에는 실패해 웰스의 발언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RKO사에서 만들게 된 두 번째 영화인 〈위대한 엠버슨 가〉에서도 웰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를 지켜보던 RKO사 사장이 그대로 개봉했다간 쪽박찰 것을 우려한 나머지 웰스가 다른 영화를 찍으러 간 사이에 서둘러 다른 감독[* 여담이지만 웰스의 영화를 재편집한 이 감독은 바로 후에 〈[[사운드 오브 뮤직(영화)|사운드 오브 뮤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의 유명한 영화들을 감독한 [[로버트 와이즈]]였다.]을 불러다 편집을 시키고 몇 부분은 재촬영하거나 새로 촬영하는 등으로 해서 웰스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영화로 재탄생시켜 버렸다. 이렇게 해서 개봉된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큰 흥행 성공을 거두었지만 영화 역사상에서는 '''가장 어처구니 없는 해피 엔딩'''의 영화로 전설로 남게 되었다. 이후 웰스는 자신의 영화 기획들이 번번히 퇴짜를 맞는 등 역경을 맞자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텔레비전]]에서 활로를 뚫으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믹을 '''존재감 있는 괴상한 배우'''로 잡았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처럼 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할리우드에서는 수십년간 바닥을 긴 감독의 길을 가게 된것이다. 영화 제작비를 벌기 위해서 다른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는 등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출연작 중에는 〈[[제3의 사나이]]〉 같은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도 있지만[* 웰스의 등장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등장 장면으로도 꼽힌다. 참고로 그는 이 영화에서 10분도 채 안 나온다.] 대다수는 B급 영화들이었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발매된 영어교재 '잉글리시 어드벤처'의 [[내레이션]]을 맡기까지 할정도였다. B급은 아니지만 존재감 있는 영화로 나온 게 프랑스 영화 〈[[아우스터리츠 전투|아우스터리츠]]〉에서 미국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로버트 풀턴[* 증기선의 개발자, 바로 그 사람 맞다.]으로 나와서 초반에 [[나폴레옹]]에게 욕먹는 [[공돌이]] 역을 맡았고, 러시아-이탈리아 합작영화 〈[[워털루]]〉 초반에서는 [[간지#s-4]] 있는 [[루이 18세]] 연기를 하기도 한다. 좀 많이 허술한 시대물 〈The Tartars〉에서는 [[몽골 제국|몽골]] [[카간|칸]]으로 나와서 [[바이킹]]인 빅터 머추어랑 연기 대결도 펼치기도 하고[* 칸인데 대단히 비대하게 칼싸움을 한다.] 〈[[보물섬]]〉에서 당연히(!) 외다리 실버 역도 했다.[* 체중 과다라 도저히 다리를 묶어 놓을 수 없고, 그렇다고 다리를 절단할 수도 없어서 설정만 외다리고 다리는 클로즈업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겨우 제작비를 만들어서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영화화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천에 옮겼다. 1948년 〈[[멕베스]]〉, 1952년 〈[[오셀로]]〉[* 이 영화는 제작비 부족으로 촬영기간이 3년이 넘게 걸렸고, 그래서 대부분의 배우들은 거의 서로 만나지 못하고 '''따로 자기 배역을 촬영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면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가 영화로 나왔지만 흥행은 하지 못 했다. 여기서도 웰스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고 배우로 출연까지 해 가면서 1인 다역을 소화하는 괴물같은 실력을 보여 줬다. 그나마 〈오셀로〉는 [[칸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으로 인정받긴 했다. 웰스의 이런 영화적 역정은 고전 할리우드 스튜디오 체계가 어떻게 해체되고 변해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꼽힌다. 나머지 [[리어왕]]과 [[햄릿]]은 결국 만들어지지 않았고 대신 [[헨리 4세]]를 비롯한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 팔스타프를 가지고 만든 [[한밤의 차임벨]]로 셰익스피어 영화화를 마무리한다. 이 한밤의 종소리는 후기 웰스 역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FevH5vP32s)]}}} || || '''말년에 찍은 와인 광고의 NG 모음'''[* 대사도 제대로 못 외우고 프로의 태도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 사람이 시민 케인을 만든 그 대배우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후 2021년 해당 광고의 조감독 피터 실링포드가 [[https://melmagazine.com/en-us/story/orson-welles-drunk-wine-commercial|비화를 밝혔는데]], 일단 웰스 본인은 [[수면제]] 약효가 너무 늦게 찾아와서 말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 말년의 웰스는 체중 관리 실패로 매우 살이 찐 상태였고[* 과식은 기본이고 군것질을 엄청 많이 하였는데 소위 쭈쭈바라고 불리는 아이스 캔디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거의 은둔 상태였다. [[듄]]의 영화화를 기획하고 있었던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그가 [[블라디미르 하코넨]]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를 캐스팅했지만,[* 식사를 하던 그에게 고급 와인을 사서 관심을 끌었고, 음식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캐스팅 조건으로 그의 단골 식당의 식사를 매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https://youtu.be/baQ09GmUjUY]]] 영화 계획이 엎어져 무산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yfyjX2cwMNY)]}}} || || '''생전 마지막 인터뷰'''[* 이 인터뷰가 끝나고 7일 뒤에 사망하였다. 사실 사망 12시간 전에 머브 그리핀 쇼에 나와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등의 모습도 보여주었으나, 그 영상은 현재 유튜브에서 삭제된 상태이다.] || 결국 B급 영화에 출연하며 제작비를 모으고 영화를 만들어 흥행에 실패하고, 다시 영화 제작비를 벌기 위해 B급 영화와 각종 광고들에 배우로 뛰기를 반복하다 [[트랜스포머 더 무비]]에 목소리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1985년]]에 70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오죽하면 오슨 웰스가 영화 분야가 아닌 다른 예술에 그 천재성을 발휘했더라면 [[파블로 피카소]]는 쌈싸먹을 천재 예술가로 남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